돌아온 ‘염전노예’ 오빠의 첫마디… “니, 대학은 졸업했나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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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수현아… 오빠 돌아왔다. 네 오빠가 17년 만에 집을 찾아왔다.”
오래전에 실종된 사람, 경찰도 찾지 못해 어디선가 외롭게 죽었을 거라 여긴 오빠가 자기 발로 집에 돌아왔다니. 발 딛고 선 현실 세상이 모두 흔들리는 기분이었다.
박수현(가명, 1974년생) 씨는 오빠 박종현(가명, 1973년생)에게 미안한 게 많다. 그날의 눈물에는 후회와 회한도 들어 있다. 오빠를 망가뜨린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다. 동생은 오빠의 ‘잃어버린 17년’과 유년 시절을 추적하기 시작했다.
동생 박수현(가명)의 1981년 초등학교 입학식 모습. 왼쪽이 오빠 박종현(가명)이다. ⓒ박수현 제공
오빠 박종현은 누구에게 끌려간 게 아니다. 빚쟁이들의 독촉으로 집이 어려워졌다는 걸 안 오빠는 스스로 부산 자갈치시장에 있는 직업소개소를 찾아갔다. 말 없는 오빠가 직업소개소 사장에게 입을 열었다.
“일 좀 시켜주세요. 돈 벌어야 하는데…. 리어카 끄는 일 할 수 있어요.”
오빠는 딱 봐도 보통 사람과는 ‘다른 사람’이었다. 직업소개소 전문가(?) 눈에는 그게 오빠의 매력으로 보였다. 오빠는 조기잡이, 새우잡이 배로 팔려갔다. 집과 마을과 학교에서 겪어보지 못한 쓴맛이 오빠를 기다렸다.
“새우잡이 배였나, 조기잡이 배였나…. 갑자기 인부 한 명이 몽둥이로 제 머리를 때렸어요. 일하는 게 마음이 안 든다면서… 머리에서 피 쏟아지고 난리가 났는데, 근처를 지나가던 해양경찰이 저를 봤어요.”
경찰은 오빠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. “당신은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다”며 오빠를 해경 배에 태웠다. 그렇게 뭍으로 나왔는데… 박종현의 기억은 여기까지다. 거기가 부산인지, 군산인지, 목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. 일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역시 기억이 불분명하다. 기억하는 건 하나다.
“배를 3년 탔는데… 돈은 하나도 못 받았어요. 월급 달라고 하면 똑같이 말하던데요. ‘지금은 곤란하다… 나중에 줄게….”
오빠는 어떻게 전남 목포까지 갔는지, 무슨 연유로 염전으로 유명한 섬으로 팔려갔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. 염전노예 사건 판결문에는 섬 주민이 “먹여주고, 재워주고, 월급 35만 원 준다”는 말로 직업소개소에서 오빠를 산 걸로 나온다. 2003년 즈음의 일이다.
“염전노예 사건 터졌을 때, 주인이 오빠를 창고에 가뒀대요. 그런데 단속이 자꾸 떠서 오빠를 부려먹을 수 없으니까, 풀어줬다고 하더라구요.”
오빠 머리의 무수한 상처는 “염전주인에게 망치로 맞은” 결과였다. 절룩이는 다리 역시 고된 노동과 폭행의 결과였다. 동생은 오빠를 착취하고 때린 염전주인을 찾아내 법정에 세웠다.
천사들의 섬이라고 광고하고 있네… 헐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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